‘시대정신(Zeitgeist)’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자신의 책 <파우스트>에서 이 말을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 시대정신에 담긴 질문은 둘이다. 하나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라면, 다른 하나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다. 다시 말해, 시대정신이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탐색하는 가치의 집약이다.
지구적·한국적 시대 진단
2025년은 ‘광복 80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정신은 ‘새로운 나라 만들기’였다. 그것은 빈곤과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산업화’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려는 ‘민주화’로 구체화됐다. 세계 시간에 뒤처졌던 만큼 지난 80년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은 ‘추격 산업화’와 ‘추격 민주화’로 진행됐다.
추격 산업화는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모든 것을 거는 전략으로 나타났다. ‘선성장 후분배’가 그 요체였다. 경제성장은 빠르게 이뤄졌고 물질적 삶은 가파르게 향상됐다. 이 추격 산업화 안에서 추격 민주화가 배태됐다. 물질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자유와 인권을 위한 민주화의 열망이 높아졌다. 그 결과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진행됐고 그 기반 위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됐다. 그렇다면 이제 ‘광복 81년’을 여는 2026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이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지구적 차원과 한국적 차원의 시대 진단이 필요하다.
먼저 지구적 차원의 국면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저성장과 뉴노멀의 지속, 인공지능(AI) 혁명의 개막과 산업구조의 대변동, 미중 경제전쟁의 진행과 신냉전 질서의 도래, 포퓰리즘의 발흥과 민주주의의 위기, 불평등의 구조화와 사회갈등의 증대, 정보사회의 진전과 탈진실 시대의 전개, 지구적 인구 증가와 100세 시대의 시작, 기후위기의 심화와 지구 민주주의의 요청, 코로나19 팬데믹의 발생과 지구적 위험의 증가, 문화적 개인주의와 부족주의의 동시 강화가 그것들이다. 2026년에는 이러한 지구적 불확실성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유무역과 탈냉전을 대신한 신보호주의와 신냉전이 더욱 강화되고,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21세기적 포퓰리즘이 더욱 득세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AI·플랫폼·집단지성이 결합해 등장한 ‘끝없는 변화’는 우리 인류를 ‘익숙한 것들과의 종언’이라는 신문명의 시대로 안내하고 있다.
한편 한국적 차원의 국면적 특징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하나의 얼굴은 ‘성공의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산업화의 성공 사례이자 정치적 민주화의 모범 사례였고, 이를 바탕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K-컬처의 힘은 2020년대 대한민국의 힘을 상징한다. 다른 하나의 얼굴은 ‘불안의 대한민국’이다. 저성장과 불평등의 구조화, 인구 위기와 지방 소멸,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공동체, 그리고 2024년 시대역행적 계엄이 증거한 위기의 민주주의는 그 구체적인 징표들이다.
2026년의 세 가지 과제
이러한 지구적·한국적 변화 속에서 2026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이재명 정부가 내건 '국민이 주인인 나라,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비전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국민주권과 국민행복은 성공의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시키고, 불안의 대한민국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 가치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나는 세 가지 과제를 강조하고 싶다. 첫 번째는 ‘새로운 성장 전략’이다. 구체적으로 시장과 정부 관계의 가치중립적 재정립, AI·바이오·에너지·문화산업 등에서의 신성장전략의 추진, 기성 제조업 경쟁력을 제고하는 새로운 산업정책의 실행, 미·중 패권 전쟁에 대응해 아시아 시장으로 향하는 신통상전략의 모색, 그리고 디지털 대전환에 조응하는 자본과 노동 간 사회협약의 체결이 그것들이다.
이 과정에서 성장과 분배, 효율성과 형평성, 기술 경쟁력 강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서로 다른 목표들을 가능한 함께 추구해야 한다. 두 번째는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익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령이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까닭은 무엇보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앞세우고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21세기적 포퓰리즘에 있다. 포퓰리즘은 사회를 ‘두 국민 국가’로 분단함으로써 국민통합의 자원을 고갈시킨다. 민주주의는 본디 제도와 문화가 함께 가는 것이다. 초연결 및 초개인화 시대에 권력을 분산하는 제도의 재설계와 타자를 인정하는 문화의 성숙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이중 과제다.
세 번째는 ‘국익 중심의 대외정책’이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질서는 앞서 말했듯 탈냉전에서 신냉전으로 변화해 왔다. 신냉전 시대는 ‘각국도생(各國圖生)의 시대’와 다름이 없다. 이러한 지구적 변동에 대응하여 우리나라는 무엇보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실용 외교를 추진하고, 한반도 평화 공존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대북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나아가, K-컬처가 지구적 차원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해 왔듯, 평화와 번영의 지구적 의제를 선도하는 전략적 행위자가 돼야 한다.
2045년에 우리나라는 ‘광복 100년’을 맞이한다. ‘광복 100년 대한민국’으로 가는 시대정신은 국민 주권과 국민행복을 온전히 구현한 ‘지구적 선도국가’일 것이다. 2026년이 지구적 선도국가로 가는 원년이 될 수 있길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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