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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상시대의 거버넌스: 경제안보와 자유무역의 균형

이미지 강문성고려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2025 겨울호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대중국 관세 강화, 산업보조금 확대, 공급망 재편 압박이 상시화되면서 글로벌 통상환경은 구조적 불확실성이 고착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효율과 경쟁을 중심에 두었던 자유무역 질서는 경제 안보, 전략산업 보호, 공급망 내재화를 우선하는 새로운 통상 패러다임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관세 문제나 양자 분쟁의 수준이 아니라, 국제 통상 질서를 재편하는 장기적 흐름이라는 점에서 한국은 기존의 대응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시적 충격 완화보다는 경제 안보와 자유무역 두 축을 조정하는 중장기 통상 거버넌스 재설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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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통상환경의 구조적 전환

주요국의 정책 변화를 보면 전환의 속도와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관세정책은 공화 및 민주 양당 모두 지지하는 초당적 기류로 굳어지고 있다. 트럼프 2기는 보다 직접적인 관세 인상과 중국을 우회한 제3국 규제까지 검토하고 있으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추진하던 공급망 재편과 산업보조금 체계도 대부분 유지되고 있다. 유럽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보호무역주의적 산업보조금 규율, 디지털 시장 규제를 통해 유럽연합(EU) 내부 산업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은 ‘자립적 기술 체계’ 확립을 목표로 반도체·AI·배터리 분야에 국가 단위 투자를 확대하는 동시에,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브릭스+(BRICS+) 등을 통해 대안적 경제권을 구축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는 효율 중심의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전략적 공급망 네트워크 중심의 블록화 체제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 속에서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가진다. 첨단 제조 경쟁력을 통해 새로운 공급망에서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지만 미·중 경쟁의 직격탄을 받기 쉬운 위치이기도 하다. 특정 진영에 지나치게 종속할 경우 산업 기반이 흔들리고, 반대로 전략적 명확성을 잃으면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중 리스크가 존재한다.

한국 통상 거버넌스의 한계와 구조적 업그레이드 필요성

이러한 외부 환경 변화와 맞물려 한국 통상 거버넌스의 구조적 한계도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부처 간 통상 기능의 분산은 전략의 일관성을 떨어뜨리고, 산업정책과 외교 안보정책 간 조정 부재는 전략산업 국제 협상에서 선제적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 디지털 무역, 공급망, 기술 보조금, 탄소규제 등 신통상 의제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음에도 이를 다룰 전문 인력과 분석 인프라는 아직 전통적 FTA 체계 중심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경제 안보를 이유로 한 과도한 보호무역주의도, 전통적 자유무역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닌 전략적 개방성을 기반으로 한 통상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산업·안보·통상을 조정하는 상설 컨트롤 타워의 강화, 전략 산업 협상을 전담하는 경제 안보 통상 조직 신설, 글로벌 보조금·관세·투자 흐름을 실시간 분석하는 디지털 통상 플랫폼 구축 등이 필요하다.

이미지 McKinsey Global Institute의 “Geopolitics and the Geometry of Global Trade: 2025 Update” 보고서에서 제시하는 핵심 시각화 중 하나로, 각국의 무역 관계를 네 가지 축-무역 강도(trade intensity), 지리적 거리(geographic distance), 지정학적 거리(geopolitical distance), 그리고 수입 집중도(import concentration)로 분석한 것이다. 일부 국가들은 지정학적으로 먼 파트너와도 무역이 많이 이루어지는 반면, 다른 국가들은 가까운 정치적 동맹국 쪽으로 무역을 재편하고 있는 양상이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보고서가 제시하는 “무역의 재구성(재정렬)” 추세를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다.

대외 전략의 정교한 균형과 중견국 네트워크 구축

대외 전략에서도 보다 정교한 균형이 요구된다. 미국과의 협력에서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 지원법(CHIPS) 등 산업보조금 체계에 대한 정례 협의 채널을 확보하고, 공급망 공동 투자와 기술 표준 협력을 확대해 한국이 규범·정책·산업 생태계 공동 설계자로 자리 잡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첨단기술 등 민감 분야는 분명한 원칙 아래 관리하되, 일반 제조업·소비재 등 비정치적 영역에서는 경제적 연계성을 유지해 상호 시장 접근성을 보전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이 미래 통상 규범의 수용자를 넘어 설계자로 나서기 위해서는 중견국 간 협력 확대가 중요하다. 디지털 통상 규범, 데이터 이동, 인공지능(AI) 윤리, 환경·탄소 규제 등 새로운 규범 영역은 아직 국제적 기준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이 시기에 인도, 아세안(ASEAN), 호주, 캐나다, 칠레 등과 연대해 중견국 중심의 규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한국의 국제 통상 영향력은 한층 확대될 수 있다. 향후 통상 협상 포트폴리오도 전면 재구성이 필요하다. 공급망 파트너국과의 FTA 확대, 기존 FTA의 디지털·환경 규범 중심 현대화, 리쇼어링과 연계한 새로운 투자협정 모델 도입 등이 한국의 협상 유연성을 크게 높여줄 것이다.

새로운 통상국가 모델로의 전환

궁극적으로 한국이 구축해야 할 방향은 경제 안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통상국가 모델이다. 산업정책, 기술 전략, 외교 안보, 무역정책이 통합되는 복합적 환경에서 통상정책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보호주의가 확대되고 공급망 리스크가 상시화되는 시대일수록 개방성과 안정성을 함께 확보하는 전략이 필수적이다. 지금은 단기 대응을 넘어 장기적 관점에서 통상 거버넌스를 전면적으로 재설계할 결정적 시기이며, 한국이 전략적 통상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다. 경제 안보 시대의 통상체계 업그레이드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핵심 기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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