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만나는 역사의 순간
‘스페인의 건달’ 알렉산데르 6세와 보르자의 악인들
2025년 5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이목이 바티칸으로 쏠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뒤 소집된 콘클라베가 새 교황을 선출했고, 마침내 이를 알리는 흰 연기가 시스티나 성당 지붕 위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콘클라베는 ‘하느님의 대리자’를 뽑는 엄숙한 의식이다. 그러나 이 의식은 한때 지극히 세속적인 욕망의 각축장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열린 콘클라베에서 탄생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당대 사람들은 여러 스캔들과 권력 남용 의혹으로 물의를 빚은 그를 '스페인의 건달'이라 부르며 비난했다.
보르자가의 악명: 알렉산데르 6세, 체사레 그리고 루크레치아
알렉산데르 6세는 순결을 맹세한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자녀들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은 경건한 종교 지도자라기보다는 권력을 쥔 세속 군주에 가까웠다. 이 시기는 흔히 ‘세속 교황 시대’라 불린다. 그중에서도 이 '스페인 건달'의 악명을 따를 자는 없었다. 정적 제거, 부정 축재, 뇌물 수수와 성직 매매, 면벌부 판매 등 각종 부패 의혹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또한 아들 체사레를 비롯한 친인척을 요직에 앉히며 교황청을 족벌 체제로 운영했다. 알렉산데르 6세뿐 아니라 보르자 가문 사람들은 세간에서 음모와 암살, 돈과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딸 루크레치아는 표독한 독살자로 알려졌으며, 체사레 또한 사생활 논란과 도덕적 일탈 그리고 전쟁터에서 보인 잔혹함으로 비난을 받았다.
영국 화가 존 콜리어는 에서 보르자가의 권모술수를 상징적인 장면으로 포착한다. 그림 속 체사레가 한 젊은이에게 독이 든 잔을 건네고, 알렉산데르 6세와 루크레치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를 지켜본다. 고요하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 장면은 보르자 가문이 정적 제거에 독살을 자주 사용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보르자가는 부와 권력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한 전형적인 르네상스 이탈리아 가문 중 하나였다. 피렌체의 메디치가, 밀라노의 스포르자가 등 강력한 가문들 역시 때로는 잔혹하고 비열한 수단을 서슴지 않았다. 사실 보르자가는 이들에 비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당대 이탈리아에서는 독살 역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흔히 쓰던 방법이었다.
존 콜리어, , 1893년, 입스위치 미술관, 영국 서퍽
보르자가는 그토록 나쁜 사람들이었나?
알렉산데르 6세는 매우 모순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역사에는 타락한 교황으로 기록되었지만, 전임 교황이 물려준 재정적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고 엄격한 법 집행으로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유럽 각국과의 살벌한 긴장과 충돌 속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도 능했다. 그렇다면 보르자가와 알렉산데르 6세가 역사책에 그토록 사악한 사람들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보르자 가문이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역대 교황은 관습적으로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이었기에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 부와 권력을 쥔 데 대해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알렉산데르 6세는 확실히 경건한 성직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이야기와 체사레, 루크레치아 보르자에 대한 평가는 다소 왜곡된 측면이 있다. 그의 사후, 뒤를 이은 율리오 2세는 보르자가를 악마화하며 조직적인 명예 훼손에 나섰고 당대 이탈리아 역사가들도 이에 동조했다.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알렉산데르 6세와 보르자 가문을 둘러싼 각종 추문의 진실 여부에 의문을 품고 있으며, 상당 부분이 과장되었거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김 선 지미술평론가
2025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