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경계를 넘어  

한국의 인문사회 학술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김인수대구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2023 봄호

지식생산 분야에서 한 사회가 지닌 품격과 역량의 수준은 학문 후속세대의 재생산 여부에서 판가름이 난다. 학문 후속세대 가운데에서도 학문을 업으로 삼기로 결심하고 묵묵히 정진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이야말로 즉각적인 지표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속할 수 있는 지식생산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이들에게 달려 있다. 연구팀(김인수, 박민철, 송경호, 이대성, 이윤정, 이민기)은 국내 인문사회 분야 박사과정생의 연구력(Research Capacity) 실태에 관한 조사로서, 연구력을 평가하고 강화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29명의 표적집단면접조사(Focus Group Interview, FGI)를 실시하였다.

제도학계 관행 속 자기 주도적 연구를 기획하는 박사과정생

박사과정생 연구자들이 긴 호흡으로 질 높은 박사논문을 작성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논문의 수 위주로 연구력을 평가하는 제도학계의 관행에 동조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박사과정생들은 “훌륭한 연구자는 논문의 수가 아니라 연구를 기획하는 능력으로 판단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좋은 논문을 매년 2~3편 정도 쓰는” 연구자를 우수 연구자로 꼽았다. 박사과정생들은 그들이 정작 과정생들임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양과 질을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는 학계의 이중 압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러한 압박감은 BK, HK, SSK 등의 거대 집단연구과제 안에 소속된 박사과정생일수록 높았다. 이들 과제 안에서 박사과정생들은 연구력의 단절과 소모를 경험하기도 했다. 박사과정생들에게 이들 집단연구과제는 실질적인 연구나 교류보다는 경제적 필요와 행정 업무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소모하는 일로 여겨지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집단연구과제의 단기 평가를 위해 쓴 논문들이 박사 학위 논문으로 종합되지 못한 채 사장되어버리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국내 인문·사회 분야 박사과정생들이 우리 학계의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각지대의 비가시화된 존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 인문·사회 분야 대학원은 외국에 유학하고자 하는 이들을 양성하는 ‘석사대학원’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고, 박사과정생을 위한 고유한 문제의식과 커리큘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들은 외국보다는 국내에서 연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더 적합한 분석과 함의를 제출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박사과정에 진학했지만, 사실상 방치된 존재였다. 각종 연구사업의 수행과정에서도 독립 연구자의 지위(‘연구책임자’)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역에서 연구하는 박사과정생은 여기에 더해 정보와 네트워크 자원의 결핍과 불균형을 경험하고 있었다. 연구비를 거대 집단과제를 매개로 배분하는 현 연구체제 안에서는 자기 주도적인 의제 설정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하였다.

박사양성모델 정립과 더불어 인식, 평가의 전환 필요

국가와 대학원, 학계는 다음과 같은 박사과정생들의 제언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첫째, 국내 인문사회 분야 박사양성모델을 정립해야 한다. 둘째, 박사과정생이 오로지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조건을 두지 않는 학비·생활비 지원의 프로그램을 늘려야 한다. 셋째, 연구자 생애 맞춤형 지원과 박사과정생에 대한 직접 지원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박사과정생을 ‘독립적인 연구자’ 로 인정하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넷째, 박사과정생의 연구 업적 평가체계의 전환이 필요하다. 교수나 박사 학위자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되고,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전문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이외의 다양한 형태를 인정해야 한다. 다섯째, 연구의 ‘원천기술’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이를 공공재로 제공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기사는 어떠셨나요?
이 기사에 공감하신다면 ‘공감’버튼으로 응원해주세요!

독자 여러분께 더 나은 읽을거리를 제공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공감’으로 응원하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