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경계를 넘어  

연구의 윤리성과 자율성을 조화시키기

이상길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2023 봄호

2012년 생명윤리법 개정 이후 인간 대상 연구를 실행하는 교육·연구기관의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설치가 의무화되었다. 연구윤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 IRB 심의를 요구받는 연구 유형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대다수 인문사회 연구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IRB 심의 절차와 윤리규정 등이 인문사회 분야의 특수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며, 때로는 연구의 자율성을 저해한다는 문제의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들의 IRB 갈등 경험 및 개선 방안 연구’(이상길, 김선기, 권수빈, 정성조, 차현재)는 IRB 심의가 인문사회 연구자들에게 어떤 불만과 고민, 문젯거리를 안겨주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연구의 자유와 윤리를 조화시킬 수 있는 효율적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했다.

인문사회 연구자들에게 IRB 심의가 불편한 이유

소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교육학, 사회복지학 등 다양한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자 152명에 대한 설문조사와 27명에 대한 초점집단면접조사(FGI) 결과는 이들이 IRB 심의의 준비 단계부터 실행 과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을 겪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우선 조사 응답자들이 누구보다도 연구윤리 문제에 민감하고 연구 참여자를 존중하는 태도를 지닌 연구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IRB의 원칙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연구윤리에 무관심하거나 제도를 무조건 불신하기 때문에 IRB에 불평을 토로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지금의 IRB 심의제도가 의학과 생명과학 분야를 기준 삼아 만들어졌기에 생겨나는 균열 지점이라든지, 관료화된 운영 방식과 융통성 없는 심의 절차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 상황 등이 다수 존재한다. 연구 분야와 방법상의 차이에 둔감한 윤리교육과 서류 양식, 심의 일정의 잦은 지연, 연구 내용에 대한 불필요한 간섭에 가까운 요구, 질적 연구에 대한 몰이해, 이른바 ‘취약한 대상(아동, 청소년, 성소수자 등)’에 대한 편협한 인식과 실질적인 배려 부족 등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IRB의 존재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인문사회 연구자들조차 심의에 타당성과 투명성이 부족하고, 연구윤리의 증진에 별 효과가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IRB 심의는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형식적인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여지고 만다. 못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윤리적이면서도 자율적인 연구를 위한 고민

인간 대상 연구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요청을 외면할 인문사회 연구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요즘의 인문사회 연구자라면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까지도 그 윤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일 것이다. 그는 또 질문할 것이다. 연구윤리란 어떤 ‘대상’에 단순히 적용해야 하는 고정불변의 기준이 아니라, 연구자와 함께 연구를 구성해나가는 ‘참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연하게 생성되고 변화하는 실천적 원리가 아니냐고. 사회 현실을 더 깊게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경험 연구에 나서는 인문사회 연구자에게 윤리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연구의 전 과정을 따라붙는다. IRB 심의는 그 현실적이고 제도적인, 게다가 종종 성가신 출발점에 불과할 따름이다. 연구자들에게 불편을 낳는 심의의 기술적인 문제점을 개선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시급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IRB가 ‘평가’나 ‘검열’ 기구가 아닌, 연구 과정 중에 부딪히는 윤리적 질문들에 대한 ‘조언’과 ‘상담’, ‘지원’ 기구로 적절히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인문사회 연구의 특수성과 연구 현장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정한’ 태도 위에서 연구자들과 생산적 소통을 시도할 때, 윤리적 연구·실천 풍토의 확립이라는 IRB의 목표 또한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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