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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자료집

영원불멸의 민족운동 지도자, 도산 안창호

영원불멸의 민족운동 지도자, 도산 안창호 대표이미지
  • 일자 2020년 04월 09일
  • 발행기관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
  • 연구자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핵심요약

  • 먼저 백성들의 실생활에 밀착하는 친화력 형성
  •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용적 리더십
  • 백성들의 관심 주제에 대한 사전 더 높은 지식 준비
  • 동조자들의 끊임없는 조직화
  • 국가와 민족의 대의(大義)의 목적 현창
  • 대의(大義)에 대한 성실한 노력과 헌신
  • 때로는 비밀결사에 의한 자기 이름과 지도력의 은익
  •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사전 공부와 치밀한 준비
  • 결정적 중요 대의(大義)에는 자기 희생
  • 어떠한 고난이 와도 목표가 옳고 실천방법이 과학적이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

주요내용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정치적 리더십은 3단계를 거쳐 형성되었다. 제1단계는 도산이 1902년 미국 유학차 샌프란시스코에 건너갔다가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상태를 보고 생활개선 사업을 하면서 형성한 리더십이다.

도산은 인사를 나누며 친분이 생긴 동포의 거처를 한 집 한 집 찾아가서 청소 운동부터 시작하였다. 도산은 집 안팎을 쓸고 유리창을 닦고, 고장난 곳이 있으면 고쳐 주고, 커튼을 달아 주었다. 다음 방문할 때에는 화분을 창문과 문전에 놓고, 꽃씨도 심어 주었다. 동포들에게 신뢰와 지도력이 형성되자 도산은 정직하고 예의바른 문화생활을 하도록 지도해 주었고, 인삼 장수들에게도 행상 구역 공평 순환, 판매가격 협정, 투매 방지에 의한 이익 보장을 위해 ‘계’를 조직하여 서로 협동하는 체제를 갖추도록 지도해 주었다.

1년 후 셋집 주인 미국인 사업가가 집세를 받으러 왔다가 한국인의 생활 면모가 일신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당신네 나라에서 지도자가 왔느냐고 물으며 만나기를 희망하였다. 집주인은 안창호가 노인일 것이라고 예측했다가 청년 지도자임을 알게 되자 더욱 감탄하였다. 그는 1년 기준 1개월 치 집세를 공제해 주고 한국인이 모이는 회관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도산은 하와이 사탕수수밭 한인 이민 노동자들이 로스안젤레스 부근에 이동해와서 유랑하자 한인 노동자로 이루어진 35가구를 모아 1904년 ‘리버사이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으며, 당당한 한국인으로 자치공동체를 만들어 공립(共立)해서 생활하도록 지도하였다. 도산은 먼저 캠프에 ‘야학(夜學)’을 차려 회원에게 영어와 문화생활 공부를 하도록 지도하였다. 도산은 항상 주변이 청결하도록 청소, 꽃을 가꾸는 등 미화 작업, 회원들이 자치적으로 ‘경찰’을 두어 번갈아 임무를 맡으면서 규약을 잘 실행하는가를 감독하고 서로 권면하도록 지도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리버사이드 공립협회 회원들의 ‘삶’이 확실하게 일신되었다.

이 무렵 강명화(姜明華)라는 사람이 리버사이드를 방문하여 동포들의 생활을 두루 살펴보고, “도산 선생의 공화국이 훌륭하다”고 감탄하였다.


민족적 대계 위에 통일집중하시오

제2단계는 도산이 1907년 2월 귀국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여 익명으로 전국 애국계몽 운동을 지도하여 한국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단계이다. 도산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한말 한국의 애국지사 약 800명이 1907년 국내에서 조직한 대한신민회는 당시 대한민국의 신교육·신산업·신사상·신실력을 양성해서 신국민의 힘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로운 새 민주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신민족·신민주 혁명당’이었다. 도산의 신민회 운동은 당시 한국민족의 실력을 비약적으로 일신시키고 증강시켰으며, 도산은 확고한 민족지도자가 되었다.

제3기는 도산이 1919년 3·1운동 후 통일되기 어려웠던 분립된 3개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리더십이다. 도산이 1919년 5월 28일 상해에 도착해 보니, 임시정부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 중국 상해, 서울에서 보내 온 ‘한성정부’ 등 3개가 명단만 각각 조직되어 분립하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임시정부는커녕 3개 독립운동소 단체가 되기도 어려웠다. 3개 임시정부 가운데 러시아령 국민의회 임시정부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도산은 모두 ‘내무총장’으로 지명되어 있었다. 도산의 업적과 지도력으로 보아 이것이 적재적소의 직임이었다. 그러나 ‘한성정부안’에서는 당시 지방차별과 출신 및 신분 차별이 작용했는지, 도산이 ‘노동국총판’으로 노동국장급으로 매우 격하되어 있었다.

도산은 3개 임시정부 통합이라는 민족사적 대의(大義)를 위하여 자기를 낮추고 희생해서 ‘한성정부안’의 ‘노동국 총판’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들이 모두 반대하고 ‘한성정부안’ 수정을 요구하였다. 총장급 지도자들의 불평에 대해서는 ‘내무총장’에서 ‘노동국장’으로 격하되는 자신(도산)이 있는데 불평 거둘 것을 설득하였다.

결국 도산의 자기희생적 리더십으로,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한국 민족사와 근대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들이 100주년을 경축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고, 도산은 영원불멸의 민족운동 지도자가 되었다.


목표가 옳고 실천방법이 과학적이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먼저 백성들의 실생활에 밀착하는 친화력 형성

2.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용적 리더십

3. 백성들의 관심 주제에 대한 사전 더 높은 지식 준비

4. 동조자들의 끊임없는 조직화

5. 국가와 민족의 대의(大義)의 목적 현창

6. 대의(大義)에 대한 성실한 노력과 헌신

7. 때로는 비밀결사에 의한 자기 이름과 지도력의 은익

8.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사전 공부와 치밀한 준비

9. 결정적 중요 대의(大義)에는 자기 희생

10. 어떠한 고난이 와도 목표가 옳고 실천방법이 과학적이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리더십은 오늘날 한국인에게도 계몽해 주는 바가 매우 크고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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