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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문학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인문학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대표이미지
  • 일자 2020년 04월 09일
  • 연구자송승철 강원도립대학교 총장

핵심요약

  • 현실과의 대화에 필요한 '인문학'

주요내용


송승철 강원도립대학교 총장


2012년 새해 벽두 몹시 추었던 날이었다. 그날 오후 압구정역 쪽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고, 지하철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붐볐다. 다들 스마트 폰에 열중하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은 상태에서 누군가와 말하고 있었다. 대화 내용은 아주 평범한 것이라, 어떻게 공중 속에서 저렇게 내밀한 개인사를 공개적으로 말할까 의아스러웠다. 아무도 대화하지 않았는데, 그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외치면서 들어섰고, 사람들은 그를 힐긋 쳐다본 후 다시 스마트폰 속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대화하지 않았고, 아무도 책을 읽지 않았다. 책은커녕 신문도 읽지 않는다. 그 순간이다, 내가 정신병동에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인문학, 희망의 현실화인가, 절망의 합리화인가

그해 겨울, 춘천댐으로 향하는 강둑을 따라 참으로 많이 걸었다. 달포 전에 내가 지지한 후보가 선거에서 패배한 사실을 믿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나는 한국 사회가 변곡점을 지났고, 이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내 삶에 지향점이 없어졌고, 타성에 젖어 허랑방탕 세월을 축내고 있다는 느낌, 내면이 텅 비어버린 상태였다. 나는 30년 가까이 학생을 가르치며 꼬박꼬박 월급을 받았고, 일 년에 한두 편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공부 외로 별다른 재주가 없어 주말에도 연구실에서 하루를 때웠다. 전공이 비평이론인지라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았다. 세월 따라 바뀌는 이론들과 이론의 대가들의 저작을 부지런히 따라 읽었는데, 그래도 열 권 사면 한 권 겨우 읽었다. 게다가 외로웠다. 이렇게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교실에서는 학생들과 소통이 매끄럽지 않았고, 인문학 전공하는 동료들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내가 공부한 이론은 그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학생들은 내 강의가 어렵다고 불평했다. 근본 문제는 어렵다는 것보다, 내 삶과 그들의 삶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강의 내용도 문제였다. 나는 현실을 세련되게 설명할 수 있지만, 내가 배운 이론들은 현실에서 희망을 살리려 하기보다, 현실의 절망과 패배를 우아하게 합리화한다고 생각했다. 


바보야, 자료가 아니고 책이다

겨울 해는 짧고 종종 매서운 바람이 불지만, 강둑을 따라 상류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에서 보는 일몰은 늘 마음을 달래준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중간중간 내 인문학의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나 묻곤 했다. 서울 지하철 병동 체험을 한 바로 다음 날이다. 내 인문학이 살아나려면, 대학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시민운동으로서의 인문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책 읽기 운동을 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왜 하필 책 읽기인가?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피켓 들고 1인 시위를 할 용기도 없고, 실타래처럼 얽힌 이해관계를 매끄럽게 풀 끈질김도 없다. 그러나 독서는 내가 오랫동안 해 오던 것이고, 그전에도 함께 읽고 싶은 적이 많았다. 내가 동료 인문학자들에게 느끼는 아쉬움은 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해 말기 바란다. 게으르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읽었지만 그것은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였을 뿐, 현실과의 대화에 필요한 ‘책’이 아니었다.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니다

독서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다음, 목표는 ‘시민’ 만들기로 정했다. 그동안 인문학의 중추는 민족 문학과 민족사였는데, 그러니까 인문학의 1차 목표는 ‘국민’ 만들기였다. 그러나, 개개인의 고유성을 희생하면서 모두를 ‘국민’으로 동질화하는 시대는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성인 책 읽기 운동이어야 했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문해력이 OECD의 전체에서 거의 바닥 수준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하긴 대학생들도 책을 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일반인 독서운동을 생각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 협조를 구했다. 다행히 주변에서 ‘책 읽기 운동’에  다들 우호적이었고, 다들 도울 수 있는 것을 말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공 여부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한 활동가는 아마 세 사람이 올 수도 있다고 냉정하게 조언했다. 그때 세 사람이 오더라도 삼천 명이 온다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6년이 지났다. 어떤 일이 성공하면 사후적으로 그 이유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는 법이다. <책 읽는 춘천>은 왜 그 나름 성과를 거두었을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춘천 시민들 내부에 인문학적 통찰에 기대 사회적 의제에 접근하려는 시민적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버트 라이쉬(Robert Reich),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그리고 다음 달의 한스 로슬링(Hans Rosling), 이런 책들은 자기개발서도 아니고, 개인적 차원의 힐링 대신, 인문학적 지혜와 사회적 의제가 결합된 책으로 혼자 읽기 쉽지 않다. 결국, 지금의 한국 사회를 어떤 식이든 바꿔보고 싶다는 욕구가 시민들 내부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닌 것이니, 절망은 엘리트의 자기과시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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