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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불굴의 삶, 법률 건국의 주역' 가인 김병로의 사법 리더십

'강직불굴의 삶, 법률 건국의 주역' 가인 김병로의 사법 리더십 대표이미지
  • 발행기관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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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섭 원장님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는 개개인에게 온갖 시련과 부침과 영욕을 안겨주었다. 나라가 위태로우면 자신을 온전히 지키기도 어렵고, 극단적 평가 속에서 상처받고 훼손되거나 오해받은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 가인 김병로 선생(1887-1964)은 그런 오점이 거의 없이 드높게 평가받아온 드문 위인이다. 특히 법률과 사법의 세계에서 김병로의 높은 업적과 바른 삶은 오늘까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첫 대법원장이자 입법자

김병로는 신생 대한민국의 첫 대법원장으로 기억된다. 그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첫 대법원장이 되었고, 9년 4개월의 재임기간 동안 사법부의 초석을 놓았고,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세웠다. 정치적 변수가 압도적인 시대에 사법부의 존재는 미미할 수 밖에 없지만, 그의 존재감은 사법부의 독립적 위상을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대통령의 힘도 사법부에 이르면 주춤했다. 소신있는 판결을 내렸던 법관들은 대법원장을 의지처로 삼을 수 있었다. 법관은 ‘정의의 변호사’여야 하고, 어떤 물질적 궁핍이나 정실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법관윤리를 강조했고 스스로 체현해 냈던 것이다. 대법원장을 퇴임할 때 그는 ‘한국 사법의 창조주’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김병로는 또한 우리의 기본법률을 제정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입법자였다. 그는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민법과 민소법, 형법과 형소법, 상법 등을 초안했다. 6.25 전시 피난처에서 그는 불편한 몸을 돌보지 않고, 불식지공(不息之功)의 자세로 기본법률의 초안을 단신으로 만들다시피 했다. 초안은 거의 그대로 법찬편찬위의 초안이 되어 국회의 일부 수정을 거쳐 우리의 현대법률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식민지 시기에도 그는 장차 독립되면 입법과 재판을 어떻게 운용할까 고민했고, 그 고민을 우리의 첫 법전에 담아냈던 것이다.


단체사진

<사진1> '가인 김병로와 사법 리더십'을 주제로 한 제19차 세종국가리더십포럼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유조리 최열렬’의 항일변호사

김병로가 대법원장, 법전편찬위원장으로 소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문성과 열정, 민족애에 대한 세간의 정평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하 그의 항일법률투쟁의 치열성과 성과에 관련된 것이다. 그는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독립운동가의 변론을 도맡아 했던 '유조리 최열렬한' 항일변호사였다. 그의 변론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조선 제일의 좌경변호사'라는 별칭도 얻었다. 그는 허헌, 이인 변호사와 함께 항일변호사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가에 대한 법적 지원과 사회적 지원에 적극 나섰다. 그로 인한 명망은 그를 일제하 대표적인 좌우합작의 민족운동단체였던 신간회의 살림을 떠맡는 위치까지 이르렀지만, 그로 인해 변호사 정직도 받기도 했고, 여러 수난을 감당해내야 했다.


일제말 지조를 지켜낸 민족지도자

그의 특기할 면모는 일제말의 가혹한 상황에서 변절과 훼절의 오점 없이 청명의 지조를 지켜냈다는 점이다. 그는 일제가 궁극적으로는 패망하겠지만 패망 직전에 탄압이 가중될 것을 예견하여 서울 중심가를 떠나 경기도 창동으로 집을 옮겨서, 농사를 짓고 닭을 치면서 위난을 대비했다. 그 개인의 퇴경(退京)에 그치지 않고, 일군의 동지들을 창동에 모았다. 홍명희, 정인보, 송진우, 박명환 등이 그의 창동 공동체의 동지로 결속했다. 또한 국제정세에 대한 최신의 정보를 얻고자 했다. 강직불굴의 자세를 가진 데다가, 선견력, 경제력, 연대력단, 정보력을 집중시켜 일제말 훼절과 변절의 압력을 이겨냈던 것이다. 정부수립후 반민특위의 재판부장에 김병로가 선출된 것도 그의 깨끗한 이력에 힘입어서였다.

그는 분열많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늘 통합을 추구한 통합주의자였다. 학창시절엔 지방색으로 쪼개진 학우회들을 통합했고, 독립운동에서는 좌·우 통합의 신간회를 이끌었다. 그의 변론도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미군정 때는 한민당을 창당했음에도 그와 결별하고, 토지개혁과 친일파 숙정의 좌우합작에 몸을 실었다. 생애 말기에는 군정 종식을 내걸고 반군정 야권 단일화에 매진했다. 적어도 민족지도자는 분열이 아닌 통합을 추구하고 실천해야 함을 그의 삶은 예증한다.


원장님2

<사진2>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이 '가인 김병로의 사법 리더십'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통합을 추구한 민주주의자

김병로는 흔히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가인 김병로>라는 그의 생애사를 쓴 필자의 입장에서, 그는 헌법가치를 수호한 민주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는 반식민-반독재로 일관하면서, 민주적 가치와 헌법적 핵심가치가 훼손될 정도에 이르면 대법원장직을 넘어서 적극적인 쓴소리를 펼쳤다. 그의 별칭 중의 하나는 '헌법'이었다. 특히 대법원장을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간 뒤에, 이승만 정권의 말기적 권력남용(경향신문 폐간, 보안법 개악, 선거부정 획책)에 대하여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며 초강도의 경고음을 냈다. “정치는 자기 몫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민주주의와 헌법가치가 훼손될 때는 묵직하고 힘있는 비판을 통해 정치에 관여한 셈이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참으로 떳떳하고 담담한 위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호는 ‘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가인(街人)이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어디 거처할 곳도 없는 거지와 같은 신세가 조선인의 삶인 것이고 그의 삶이었던 것이다. 사회의 가장 낮은 백정과 가장 평범한 사람에서 백범(白凡)이란 호를 지었던 분과도 상통되는 호인 것 같다. 탁류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혼탁해지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시대압박에 직면해서는 동지들과 미래를 기약했다. 그러면서도 전문성의 연마를 통해 미래의 민족삶에 실질적 혜택을 주었다. 1963년 그의 생애 마감에 즈음하여 남긴 어록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정의와 대도로 나가면서 국민에게 씨를 먼저 뿌리자. 씨를 뿌려놓으면 앞으로 이 씨를 수호할 사람도 나올 것이고 또 거둘 사람도 나올 것이다. 씨를 뿌렸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가 키워 열매를 거두어야만 된다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씨라도 뿌려놓아야 한다.” (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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