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APEC이 그린 아시아태평양 질서의 새로운 밑그림과 과제
2025 APEC은 다자주의가 위협받는 가운데에서도 아태지역 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AI 이니셔티브와 인구구조변화 대응 합의 같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자리였다. 이제 우리가 제안한 협력 방향이 선언문에 머물지 않고 아태지역의 새로운 질서로 안착하도록 논의를 더 깊이 이어가야 한다.
경주 APEC 정상회의가 남긴 성과
2025년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외교 행사를 넘어,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 무대였다. 미·중 경쟁이 심해지고 보호무역주의가 거세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시아태평양 21개 회원경제체 정상은 ‘경주 선언’을 통해 협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인공지능(AI) 이니셔티브와 인구구조 변화 대응 같은 미래 핵심 문제를 앞장서서 의제로 삼았다. 이는 ‘새로운 역내 질서’를 논의할 수 있는 판을 깔았다는 데 큰 뜻이 있다. 우리가 던진 화두가 회원국들의 공감을 얻고 모두의 관심사가 된 것은, 한국이 단순한 참여자를 넘어 의제를 설정하는 나라로서 힘을 보여준 결과다.
민간 투자 유치와 실질적 협력
성과는 회의장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함께 열린 CEO 서밋과 기업인 행사에서 글로벌 리더들은 한국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투자와 협력을 약속했다. 특히 엔비디아(NVIDIA)가 최신 GPU 26만 개 공급을 약속하는 등 민간 분야에서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하고 중국과 관계를 회복하는 등 연이은 정상회담을 통해 경제 협력의 틀을 다진 점은 APEC이라는 무대를 계기로 우리가 어떻게 실질적인 이익과 협력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준 확실한 본보기였다.
성과의 연속성 확보와 연구기관의 역할
정부의 꼼꼼한 기획과 민간의 호응, 그리고 학계의 지혜가 모여 이 유산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고 주인공들은 떠난다. 밤을 새워 행사를 기획하고 합의문을 다듬으며 투자를 이끌어낸 관료들은 이제 곧 다른 부서로 흩어진다. 사람은 바뀌고 문서 행간에 숨은 고민과 전략은 잊히기 쉽다. 어렵게 쌓아 올린 인맥과 외교 자산이 단발성 행사의 추억으로만 남는다면 이는 큰 손실이다.
APEC 성공 개최라는 성과를 지혜롭게 관리하려면 국책연구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미 많은 연구기관이 관계 부처를 도와 성과를 내는 데 힘을 보탰다. 앞으로는 성과가 꾸준히 이어지도록, 쌓인 경험과 지혜를 다음 APEC과 다른 국제 무대에서도 쓸 수 있게 돕는 '지적 계승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새로운 아시아 태평양 질서를 위한 과제
첫째, ‘AI 이니셔티브’를 구체화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경주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APEC 처음으로 AI 활용과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 약속을 이끌어냈다. 국내적으로는 AI 기술과 활용의 핵심 국가로 성장하는 가운데, 이니셔티브에 담긴 ‘AI 아태 센터’의 역할과 운영을 구체화하고 이를 활용할 정교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역내 모든 경제 주체가 AI를 잘 쓸 수 있도록 도와 우리 기술과 기업에 더 넓은 시장과 기회를 열어주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미·중 경쟁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에 맞서 국제질서의 안정을 가져오는 중심국가로의 성장 전략이 필요하다.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난 미·중 정상은 역대 어느 때 보다도 높았던 글로벌 통상환경의 불확실성 속에서 각자의 일방적 통상조치를 1년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1년 후, 중국에서 개최되는 APEC과 연이어 미국에서 개최될 G20에서 어떤 합의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한국은 내년 APEC과 G20으로 이어지는 다자논의 가운데에서 갈등을 완화시키고, 다자무역체제를 지지하며 포용적 성장을 이끄는 새로운 역내 질서 구축의 ‘핵심 관계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 아울러 기후변화, 인구 문제 등 인류가 처한 공통 난제에 대해서도 실용적 협력을 이끌며 외교 무대를 넓혀야 한다.
셋째, 2034년까지 이어지는 ‘APEC 로드맵’을 그리는 일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열릴 APEC 개최국이 이미 정해진 만큼 각 경제체의 통상환경에 맞춰 한국이 주도할 수 있는 핵심 의제를 선제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더 나아가 2028년 G20 개최를 선언한 만큼, APEC에서의 성과가 G20, OECD, WTO 등 다른 국제기구에서도 일관된 메시지로 전달되도록, 우리가 만든 판 위에서 글로벌 논의가 흐르게 하는 전략적 설계가 필요하다. 이는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대응이 아니라 10년을 내다보는 깊이 있는 연구가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2025 APEC은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면서도 국익을 챙기는 실용 외교의 본보기가 되었다. 급변하는 통상환경 속에서 역내 안정을 꾀하고 새로운 미래 의제를 이끌며, 경제 성장의 동력을 제시하는 능력을 입증했다. 이 소중한 유산이 과거의 기록으로 멈추지 않고, 아태지역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한국의 역할이 커질 수 있도록 치열한 연구와 정책적 뒷받침이 절실하다.
이 주 관대외경제정책연구원 APEC 연구컨소시엄 사무국장
2025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