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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산업과 경제 동향을 읽는 정책 연구자의 시선
일본은 반도체, 전자, 자동차, 로봇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산업 발전과 경제 전략 수립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질서 속에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산업연구원의 연구자들은 일본의 경제 동향과 산업 정책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연구의 최전선에서 학문적 통찰과 정책적 비전을 결합해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 전략을 구상하는 두 연구자를 만나 그들의 연구와 비전을 들어보았다.왼쪽부터 김양팽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전략연구실 전문연구원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동아시아팀 선임연구위원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하 김규판)
제 연구 주제는 2017년 1월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일본 경제와 산업 구조 변화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장기 침체, 즉 ‘잃어버린 10년, 20년, 30년’ 과 같은 경제 문제, 재정위기, 제조업의 갈라파고스화 같은 이슈를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통상 정책이 자유무역질서(WTO, FTA)에서 자국 중심주의(America First)로 급격히 변화했고 이에 따라 경제안전 보장이 중요한 연구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그 결과, 현재는 일본 경제를 연구하면서 경제안전 보장 전략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와 같은 첨단 산업의 공급망 정책 그리고 첨단 과학 기술의 육성과 보호 정책을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습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 (이하 김양팽)
1980년대 일본은 세계 시장에서 큰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일본의 산업과 경제 성장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그 연구를 유심히 살펴보던 중 일본의 노나카 이쿠지로 교수가 제시한 ‘암묵지(暗默知)’ 이론에 매료되었고 일본의 경제 성장과 산업 구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이후 지금까지도 일본 산업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 연구는 산업연구원에 입사한 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의 산업을 담당했으나 당시 한·일 관계 악화의 영향으로 일본 연구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 반도체 산업 연구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관심이 있던 전자 산업과 연관된 반도체 연구로 자연스럽게 방향을 전환하게 됐습니다.
기술과 정책을 잇는 일본 산업을 연구하다
김규판
저 역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입사한 이후 관심사와 연구 방향에 맞춰 일본의 지역 경제와 산업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2011년 기본 연구 과제로 추진한 ‘일본 제조업의 갈라파고스화’ 연구는 제게 매우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연구에서 저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 변화를 다각도로 분석했으며 특히 전자 산업에서 두드러진 ‘갈라파고스화’ 현상의 원인과 그 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 연구 결과, 만약 일본이 1980년대 제조업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다면 오늘날 반도체·AI·첨단 바이오·양자 기술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 실태 분석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로 출간됐으며, 이후 경제 안보와 글로벌 공급망 논의에서 일본의 입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됐습니다.
김양팽
일본의 경제 정책 변화가 한국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인 「일본의 소비세 인상으로 인한 한국 산업의 영향」이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은 적 있습니다. 그 중요성과 시의성 덕분에 여러 차례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있었어요. 그 반응을 보고 국책연구기관의 역할과 사회적 기대를 깊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의미있었던 연구는 처음으로 한국의 주력 산업 연구에 반도체 산업 담당자로 참여했던 경험입니다. 이곳에서 분야별 산업 전문가들과 함께 「한국의 주력 산업」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당시 전자 산업뿐만 아니라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지만, 경험이 풍부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연구에 적응하며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산업연구원의 강점은 각 산업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의견을 나누고 산업 간의 영향을 분석하며 전망을 세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현재 저는 반도체 산업 전문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김규판
정책연구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제 연구 주제가 실제 정책에 반영되거나 논의될 때입니다. 한국의 산업 정책과 경제 전략 수립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느끼죠. 또한 가끔 기획재정부나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주관하는 토론회에 참석해 일본 경제를 주제로 발표할 기회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제 의견에 공감해 줄 때는 더욱 보람을 느낍니다.
물론 민감한 사안과 관련해 우리가 제기하는 이슈에 대해 정부의 입장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연구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고민이 커지기도 합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전략연구실 전문연구원
김양팽
저 역시도 일본 산업과 반도체 산업을 함께 연구하며 제 연구가 한국뿐만 아니라 한·일 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오랫동안 양국 관계가 불편한 상태이기도 했죠. 하지만 2023년을 기점으로 관계가 점차 개선되면서 한·일 산업 협력을 위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반도체 산업은 양국이 오랫동안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 온 분야로 앞으로도 그 중요성과 필요성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반도체 산업은 공급망 안전성과 기술 협력이 필수적인 분야이기에 양국 간의 상호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연구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동아시아팀 선임연구위원
글로벌 정세에 맞게 발전하는 국책연구
김규판
지역 연구자의 입장에서 정책연구자가 성장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글로벌 통상 질서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세계 패권국가인 미국의 통상 정책과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이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글로벌 환경을 중심으로 자신이 연구하는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경제안전 보장정책을포함한 통상정책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기본 역량입니다.
김양팽
저는 한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외무부 소속의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 후 국책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에 입사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정책연구를 수행하며 정책 입안과 집행 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현재 연구를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즉,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많은 경험을 직접 쌓기 어려울 수 있기에 항상 언론에 귀 기울이며 다양한 소식을 접하고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간접적으로 다양한 사례를 접하다 보면 빠르게 이해하고 정책 과정에 도움이 되는 연구 결과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책연구자는 자신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나라를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김규판
또한 정책연구가 실질적으로 우리 정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현지 연구자들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네트워크 구축, 공동 연구, 포럼, 세미나 등을 통해 현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협력을 통해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자신의 연구에 반영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정책 제언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현재 국책 연구기관은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주체로 협동연구를 진행하며 매년 중점 주제를 선정하고 활발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과 복잡한 국내 경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협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통상 대응 과제와 한·미·일 간 경제안전보장 및 첨단기술협력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이민 수용 문제), 재정 악화, 신성장 동력 상실 등 다양한 현안에 대응하기 위한 국책연구기관 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김양팽
국책연구기관은 기관별로 특색이 뚜렷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분야 간 경계를 넘어 협력이 필요한 과제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 구조가 변화하면서 단일 분야의 접근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여러 연구기관이 공동 연구를 통해 보다 효과적인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좋은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각 기관이 공동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연구자들이 행정적으로 어려움 없이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만약 타 기관과의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면 불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낭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규판
국책연구기관 소속 연구자, 특히 일본 지역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단기적인 현안 대응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인 연구 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 전문가 풀(Pool) 제도를 운영하며 국내 국책연구기관뿐만 아니라 국내 학계 및 일본 내 한국 경제 연구자들과 협력해 연간 3~4회의 포럼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포럼을 토대로 정기적으로 한·일 간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도 열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 연구와 전공 분야를 결합한 ‘매트릭스 형태(지역×전공)’의 연구 네트워크를 더욱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연구에서도 장기적인 협력 기반을 마련하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 성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영감과 영향을 주는 정책연구자
김규판
연구자를 정책연구자와 비정책연구자(순수학문연구자)로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책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연구자는 기본적으로 정책연구자로 볼 수 있습니다. 연구자의 역할은 각자의 연구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일본 지역 연구를 수행하는 입장에서 정책연구자는 일본의 경제·통상 정책을 연구해 우리나라의 대일 경제·통상 정책 수립과 협력 및 조정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양팽
정책연구자라는 개념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생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책연구자란 학술적인 지식을 무기로 삼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술 연구자나 대학교수와 달리 정책연구자는 책 속의 이론에 생명을 불어넣어 현실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고 사회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연구자라고 생각합니다.
김규판
좋은 연구자란 특정 분야에 대해 깊은 전문성을 갖추고 해당 분야의 특수성과 현안을 정확하게 이해하며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 지역 연구자로서 일본의 경제와 산업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직면할 수 있는 문제들 특히 저출산·고령화·노동력 부족·재정 악화 등을 예측하며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궁극적으로 연구 결과가 한국의 정책 담당자들에게 실질적인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는 연구자가 돼야 합니다.
김양팽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연구는 사회에 ‘쓸모’가 있는 연구입니다. 특히 국책 연구는 이론적 탐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제 정책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좋은 연구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겸손’과 ‘겸허’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연구한 내용이라도 그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자세를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김규판
연구자로서 대학 학계와 국책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연구자 간의 차이를 실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는 때로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빛을 보지 못할 때가 있지만 저는 그럼에도 자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제 연구가 일본 경제와 산업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누구든 저에게 질문하면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연구자로 남고 싶습니다. 궁극적으로 제 연구가 동료 연구자와 후배에게 정책연구에 더 많은 관심을 끌게 하고 더 나은 연구자로 성장하는 데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양팽
연구자로서 저는 제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동료들에게는 편안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편안한 관계 속에서 동료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개인적인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연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믿습니다.
김규판, 김양팽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동아시아팀 선임연구위원,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전략연구실 전문연구원
2025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