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IN
법제의 최전선에서 완벽한 정답이 아닌 ‘작동하는 해법’을 찾는 사람들
어떤 연구는 미래를 바라보고 어떤 연구는 현재의 땅을 밟고 선다. 정책연구는 그 둘 사이의 경계 위에 서 있다.
한국법제연구원 장은혜 팀장과 임단비 부연구위원은 이 경계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이다. 답이 필요한 정책 현장에서, 법이 뒤따라 숨 고르기를 하는 순간에도, 두 연구자는 ‘작동 가능한 해법’을 향해 묵묵히 점을 찍는다. 그 점들이 모여 선이 되고 그 선들이 모여 하나의 제도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들은 정답을 완성하기보다 가능성을 열어두는 연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실보다 반 발짝 앞서되 지나치게 앞서가지 않는 균형. 혼자 파고들되 끝내는 함께 연결되는 힘. 두 연구자가 말하는 법제 연구 이야기를 들어본다.
기후·환경을 중심으로 분리된 두 축을 잇다 왼쪽부터 장 은 혜 한국법제연구원 기후변화·ESG법제팀 팀장
임 단 비 한국법제연구원 기후변화·ESG법제팀 부연구위원
장은혜 한국법제연구원 기후변화·ESG법제팀 팀장 (이하 장은혜)
올해 수행한 연구는 ‘기후적응과 기후재난관리의 연계성 강화’에 관한 것입니다. 기후위기가 점점 현실화되면서 기후적응과 재난관리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데, 국내 제도는 여전히 두 체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얼마 전 태국의 ‘아시아 재난 대비 센터’를 방문하면서 기후적응과 재난관리가 분리된 문제가 더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동남아 국가들은 기후재난을 일상의 문제로 인식하고 회복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난 관리를 재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아직 기후재난의 체감이 약한 편이지만 그 격차는 점점 좁혀질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후적응과 재난관리 체계를 어떤 수준에서 연결해야 하는지, 한국 현실에 맞는 합리적 연계 모델을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단비 한국법제연구원 기후변화·ESG법제팀 부연구위원 (이하 임단비)
저는 자연환경 보전의 관점에서 기후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물다양성 손실이나 기후위기 같은 문제들은 국가만의 노력으로는 해결이 어렵고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입니다. 전통적으로 환경보전은 늘 국가 중심으로 이뤄져 왔지만 사회가 빠르게 변하면서 국가가 커버하지 못하는 영역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환경보전을 민간 영역으로 더 확장하려면 어떤 법과 제도가 필요할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해 생태계서비스지불제나 탄소흡수원 제도처럼 자연보전 활동을 유인할 수 있는 장치들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인센티브 제도가 논의되긴 했지만 기대만큼 성과가 뚜렷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법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설계해야 할지 연구 중입니다. 학위 과정부터 해 온 분야라 더 애착이 가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국제 협력과 낯선 분야로의 확장: 한국 법제의 위치를 확인하다
임단비
연구자로서 가장 큰 확장을 경험한 순간은 블루카본(해양 탄소흡수원) 법제를 연구할 때였습니다.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탄소흡수원’ 하면 대부분 산림 중심으로 생각했는데, 해양의 잠재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제도적 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제로에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도 컸습니다. 그러던 중 원장님께서 이 분야의 국제 전문가와 연결해 주신 덕분에 블루카본 연구의 최전선에 계신 전문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향후 기후변화 법제 연구를 지속해야겠다는 큰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장은혜
원장님께서 호주 해외 출장 중에 들고 온 명함 한 장에서 시작된 인연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전 세계 블루카본 분야에서 가장 손꼽히는 전문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분과 자문을 주고 받으면서 놀랐던 점은 우리가 겪는 고민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기후·재난 법제는 아직 세계적으로도 체계화가 완성된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선진국이라도 완벽한 모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 보고 있는 단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임단비
저희가 비교법 연구를 많이 하는데, 보통 ‘외국에는 더 앞서 있는 제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접근하곤 합니다. 그런데 호주의 권위 있는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결국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와 거의 비슷한 지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해양 탄소흡수원 제도처럼 우리는 0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했는데 호주도 이해관계 조정이나 제도 설계 문제를 똑같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뒤따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같은 문제를 동시에 풀고 있는 위치구나’라는 걸 깨닫게 됐고, 그 점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장은혜
예전에는 외국 법제를 연구할 때 늘 ‘우리는 한 발 뒤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비교법 연구를 해보면 한국이 뒤처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먼저 시작한 분야도 적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 이제는 한국 법제가 ‘따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글로벌 흐름과 나란히 가는 위치라는 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정책 연구의 무게, 반 발짝 앞선 해답을 찾는 일
장은혜
한국법제연구원이 제게 특별한 이유는 전국에서 법학전공자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동일한 전공자들이 모여서 전 분야의 법률을 검토하고 같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곳으로는 유일합니다.
특히 한국법제연구원은 법학 및 법제도 중에서도 공법(행정법 및 헌법)에 더 특화된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공법이 추구하는 바는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정 개인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공공성을 기초로 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전문성을 쌓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과 안도감을 느낍니다.
임단비
팀장님 말씀에 더해 한국법제연구원은 국가의 입법정책을 지원하는 대표 연구기관으로서 입법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갖춘 곳입니다. 좋은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직장에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정책연구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장은혜
정책연구와 학문연구는 구조적으로 다릅니다. 학문은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최선의 답을 찾는 과정이라면, 정책연구는 주어진 시간 안에 ‘지금 필요한 답’을 찾아야 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A가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정책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B를 제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게 정책연구자가 감내해야 하는 무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법 제정 논의가 시작되곤 합니다. 세월호나 이태원 사고처럼 사고 이후 단기간에 조직이 신설·폐지되거나 급하게 법이 만들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원래라면 법의 필요성과 체계를 정교하게 따져야 하지만, 국회에서 여론 입법 방식으로 바로 통과돼 버리면 담당 부처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상태에서 6개월 안에 하위 법령까지 만들어야 합니다. 이럴 때 완전한 청사진이 아니라 ‘일단 굴러가는 틀’이 필요해집니다. 그 틀을 만드는 건 결국 연구자의 몫입니다.
임단비
저도 입법 과정에 참여하면서 이 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많이 느꼈습니다. 연구자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이상적인 방향도 있지만 법은 결국 현실에서 작동해야 합니다. 실행 가능성이 떨어지는 제안은 아무리 멋진 해법이라도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법률이 시행 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책상에서 고민했던 게 현장에서 실제로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이것이 정책연구자로서의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은혜
때로는 욕을 먹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정책 담당 부처는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데, 그 근거를 정리해 주는 사람이 연구자입니다. 법률은 사회 현상이 발생한 뒤에 뒤따르는 경우가 많아 다른 분야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 법학이 아니라 이것이 정책과 연결이 되는 경우 이 보수성을 뒤집을 수 있는 유연함과 탄력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단비
국책연구기관의 정책연구자는 공공성과 전문성을 함께 갖춰야 해서 자연스럽게 중립성과 객관성이 요구됩니다. 그러려면 먼저 복잡한 정책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그 위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양한 학자나 공무원, 실무자들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선배 연구자들께서 늘 하신 말씀이 ‘법은 현실보다 반 발짝만 앞서야 한다’였습니다. 법은 사회를 이끌기도 하지만 결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해서 현실과 동떨어지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은혜
최근에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신규 법률 제정 수요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원래 정책은 기초연구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내용을 채운 뒤 마지막에 법률로 제도화를 완성하는 순서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법률을 먼저 급하게 만들고 정책을 나중에 뒤따라 채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가가 정책의 지속성을 확보하려고 법으로 먼저 근거를 박아두려는 경향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그 흐름이 완전히 바람직하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표현을 학교에서 배우잖아요. 그런데 공법 영역에서는 법이 점점 더 앞서 나가고 국가의 선언적 수단처럼 쓰이는 느낌도 듭니다. 기후 분야만 봐도 예전엔 국가 감축 목표처럼 구체적 수치를 법률에 넣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몇 년까지 무엇을 하겠다’는 내용을 법에 직접 넣고 있습니다. 작년 헌법재판소의 탄소중립기본법 헌법불합치 결정도 그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단비
그래서 저는 정기적인 연구 교류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KDI 김현석 박사님과 ‘정의로운 전환’ 세미나를 했는데, ‘법제와 개발경제 관점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는 과정이 연구 범위를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이런 교류가 정례화되고 공동연구로 이어진다면, 단일 기관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좋은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팀장과 막내, 서로를 끌어올리는 힘
장은혜
저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사실 연구원에 오기 전에는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막상 와보니 끊임없이 협업해야 하더라고요. 발표나 토론도 업무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아직도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매번 긴장이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사석에서는 정말 활발한 임단비 부연구위원도 발표나 토론 앞에서는 저만큼 떨린다는 점입니다. 서로 그 감정을 너무 잘 아니까 한 사람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끄집어내고, 또 상황이 바뀌면 역할을 바꾸면서 서로를 세워주게 됩니다.
임단비 부연구위원은 첫 연구조직이고 막내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팀장님, 이거 어떻게 해요?” 하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오면 제 나름대로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막상 비슷한 상황이 제 앞에 닥치면, 임단비 부연구위원이 “시작이 반이에요, 팀장님.” 이런 식으로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준 적이 많습니다. 이런 순간에 팀으로 일하는 힘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요즘은 팀워크의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낍니다. 제가 못 보는 걸 누군가 보고, 동료가 부족한 부분을 제가 채우고, 내가 놓친 것들을 다른 사람이 보완해 주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임단비
새 연구를 시작할 때면 저는 항상 걱정합니다. ‘이게 혹시 의미 없는 연구로 끝나는 건 아닐까?’ 하고요. 그럴 때 팀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찍는 작은 점 하나가 당장은 작아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그 점들이 서로 연결돼 하나의 선이 된다.’ 그 말씀이 정말 큰 위안이 됐어요. 당장의 결과에 조급해하지 말고 점 하나라도 찍어두는 게 연구자의 성장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장은혜
좋은 연구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능성의 길을 열어주는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고, 오늘의 해법이 내일은 작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연구자는 스스로 세운 결론에 머무르지 않고 필요할 때 유연하게 방향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후변화 연구를 하면서 특히 느낀 게 있습니다. 기후 분야에서 법률은 항상 가장 ‘끝단’에 있거나 ‘출발점’에 있더라고요. 법만 들여다봐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현장 실무자, 기술자, 기초연구자, 환경단체 등 정말 많은 분들과 네트워킹하지 않으면 내용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뼈대를 만들면 현장의 분들이 내용을 넣어주고, 또 그분들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뼈대 자체가 틀어져 버린다는 걸 배웠습니다.
임단비
정책과 법제 연구에서 좋은 연구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고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라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연구자에게는 몇 가지 덕목이 필요합니다. 첫째, ‘이 연구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성찰적 태도입니다. 둘째, 사회 변화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 속에서 문제를 포착하는 민감성입니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연구자도 이러한 변화를 따라잡으며 새로운 정책 수요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양한 주체들과 소통하는 능력입니다. 이를 통해 비로소 현실성 있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장은혜
저는 항상 성장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지속적으로 배우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같이 걸어가야겠다’는 의욕을 주는 동료가 되면 좋겠습니다.
임단비
저는 연구자로서 ‘이 사람이 제시한 대안은 현실성 있고 실행 가능성이 높다’라는 신뢰를 받고 싶습니다. 한국의 전기차 배터리 재활용에 관한 법제를 외국의 정책결정자들과 공유했을 때, 그분들이 정말 진지하게 참고해 주셨던 경험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연구가 실제 정책을 바꾸는 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동료들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성장하는 연구 파트너로 기억되는 것, 그게 제 목표입니다.
장은혜, 임단비한국법제연구원 기후변화·ESG법제팀 팀장, 부연구위원
2025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