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던 중국의 산업구조 개편으로 아세안 국가에도 새 바람이 불고 있다. 팬데믹 상황 이후, 인건비 상승과 더불어 산업 구조의 변화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개편에 따라 중국 시장에 진출한 다국적 제조업 기업들 중 상당 기업이 아세안 국가로 넘어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경우 아세안에 대한 투자의 전진기지로 인도네시아를 활용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인도네시아가 아세안 내 총생산(GDP)의 약 35%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의 해외투자 비중을 살펴보면 직접적인 금융투자보다 제조업 분야로의 투자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을 살펴볼 때 제조업 산업이 빠르게 아세안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투자부(BKPM)에서 발간하는 자료를 보더라도 인도네시아의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약 198달러로 1년 전보다 35.5% 증가한 수준이며 특히, 제조업 분야의 경우 약 109억 달러로 전체 외국인 투자의 55%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중국의 경우 코로나19에 대한 강도 높은 방역 정책을 시행한 까닭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사업환경이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산업구조가 중국 등에서 아세안 국가로 전이되는 데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세안 지역은 세계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 호주 등의 국가들은 이미 아세안 지역에 오래전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민간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신 정부의 아세안 지역에 대한 뚜렷한 정책 방향이 아직 보이지는 않고 있다. 오래전부터 아세안에 정책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아시아의 OECD를 목표로 출범한 ERIA
ERIA는 2007년 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사진은 지난 8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 모습아세안은 2015년 12월 EU 수준의 경제통합을 목표로 아세안경제공동체(AEC; ASEAN Economic Community)를 출범하였고 해마다 아세안과 동아시아 3국(한국, 일본, 중국)은 경제장관회의와 정상회담을 가지고 있다. 이들 회의에서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Economic Research Institute for ASEAN and East Asia)는 한해의 지역 경제를 분석 및 전망하고 공동으로 추진할 정책을 기획하는 설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아세안 회원국의 경제정책 수립도 지원하는 국제기구로 발전하고 있다.
2006년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아세안-일본 경제장관회의에서 일본은 아시아의 경제발전과 협력을 연구하고 기획하는 싱크탱크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설립을 추진하여 2007년 동아시아정상회의(EAS: East Asia Summit)에서 공식적으로 ERIA를 출범하였다. 일본 정부는 매년 200만 불 이상의 예산에 전적으로 지원하고 원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을 일본인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에너지, 농업, 산업, 보건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아세안 사무국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현지 전문가도 고용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ERIA는 아세안 역내외 정부회의에 참석하여 연구결과를 발표할 뿐만 아니라 아세안의 여러 기구에 참여하여 아세안을 위한 어젠다를 기획하고 있다. 경제장관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 EAS 정상회의 등이 이에 속하며 연구 분야도 기존 4개 분야에서 노동, 중소기업, 금융, 여성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2017년에는 아세안 설립 50주년을 테마로 ‘ASEAN@50’이라는 5대 분야별 시리즈물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EAS는 2005년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호주·뉴질랜드·인도 6개국이 참여하는 동아시아 정상회의체로 출범한 이후 2011년에 미국과 러시아가 추가로 참여하여 현재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EAS 참여 국가를 중심으로 각 국의 연구기관, 대학과 연구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아시아의 OECD로 발전하고 있다.
개별 국의 정책 연구를 개발 협력사업으로
아세안은 풍부한 자원과 인구로 높은 성장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낙후한 인프라와 인적 자본으로 경제발전은 정체되었다. ERIA는 아세안 후발 가입국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의 에너지 기본계획을 수립해주었고 기초 자료 조사를 위한 기반도 조성해주었다. 이러한 정책 연구의 결과는 세계은행(World Bank)과 아시아개발은행(Asia Development Bank) 등 국제기구와 함께 이들 국가의 부족한 에너지 인프라를 지원하는 개발협력사업으로 적극적으로 연계하고 있다. 비록 ERIA는 일본 정부의 자금과 경영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현지 정부와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기초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창출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와 아세안의 관계는 가까웠지만, 미·중 무역분쟁과 글로벌 공급망 단절이 발생하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가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아세안으로부터 한국의 사업참여와 지원을 확대해달라는 요청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의 첫 시험대를 아세안에서 맞이하고 있다.
정책적인 협력사업은 한순간에 그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석의 결과들과 기초자료들이 축척되면 될수록 그 효과성은 견고하고 오래동안 지속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민간 기업들의 경우 단기간의 영업이익을 위해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이익이 높게 실현되는 곳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책적인 것은 당장의 이익이 아니더라도 중장기적 전략이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협력사업이다.
한국의 싱크탱크가 단기간에 ERIA와 같은 역할과 위상을 쌓기는 힘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국제적인 경쟁을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차원의 분발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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