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책지식 생태계' 탐구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연구자를 탈출시켜라!

서혜빈한겨레신문 사내벤처 초록(Abstract)팀장  2022 겨울호

초록팀은 한겨레신문 1호 사내벤처로, 내부 공모를 통해 2022년 3월 탄생했다. 1년 동안 사업화 자금 1억 5천만 원을 가지고 활동한다. 팀 이름은 초록색의 초록이 아니라 논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초록(Abstract)이라는 뜻이다. 어렵고 딱딱한 연구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로 만들고 있다. 현재 <초록학개론>이라는 연구 큐레이팅 뉴스레터를 발행하며, 학문의 대중화를 꿈꾼다.

한국의 갈라파고스 제도, 학계

초록학개론 페이지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1,000km 떨어진 곳엔 태평양 화산 제도인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다. 이곳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동·식물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용어로도 흔히 쓰이는데, 자신들의 표준만 고집하면서 시장에서 고립되는 현상을 말한다. 과한 비유일 수 있지만, 한국의 학계도 그런 것 같다. 사회와는 고립된 채 학자들만의 리그 속에서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걷는 듯하다.

세 가지 진입장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폐쇄적인 연구 유통 구조다. 논문 한 편 보려면 DBpia, 교보문고 스콜라와 같은 학술 데이터베이스 플랫폼에서 구매해야 한다. 유료로 구독하는 기관 소속 구성원이 아니면 열람하기 어렵다. 정부가 주도하는 오픈 액세스 플랫폼이 등장했지만, 원하는 자료를 찾기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 두 번째 진입장벽은 학자들의 연구 표현 방식이다. 논문이나 연구보고서를 읽다 보면 독자를 위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일 분야의 소수 연구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여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학자들이 연구 홍보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학자의 고객은 대중이 아니다. 나의 국회와 정당 연구소, 국책연구기관, 그리고 대학원에서 연구 보조 경험을 보면 국회, 정부, 용역기관이 고객이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어필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학문의 존재 목적은 우리가 마주한 시대적 과제를 의제화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사실상 공공재적 성격을 갖는다. 실제로 많은 연구가 정부의 R&D 지원, 즉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학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사회문제를 겪는 일반 대중과의 소통이 필수다. 대중이 연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연구자도 ‘영업’과 ‘마케팅’에 익숙해져야 한다

초록팀은 궁극적으로 학문의 대중화를 꿈꾸며, 2022년 가을부터 좋은 연구를 발굴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로 만들고 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의 연구를 중심으로 연구요약과 저자 인터뷰를 콘텐츠에 담았다. 많은 구독자가 ‘논문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어떤 이슈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알게 됐다’라는 피드백을 보냈다. ‘영화 덕후’, ‘책 덕후’처럼 어쩌면 ‘학문 덕후’들도 탄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섭외엔 생각보다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본인의 연구가 재밌게 소개되는 과정을 즐거워했다. 최근엔 국책연구기관 16곳을 대상으로 성과확산팀 직원들에게 콘텐츠 제작 협업 요청 메일을 보냈다. 큰 기대 없이 발송했는데, 이틀 만에 5개 기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현재 연락을 준 모든 기관과 협업하고 있는데, 연구자 섭외나 내용 구성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점이 인상 깊었다. 생각보다 학계 곳곳에 연구 홍보와 대중과의 소통에 관심 있는 사람과 기관이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연구자에게 ‘영업’과 ‘마케팅’이라는 말이 익숙하진 않겠지만, 아무리 대단한 연구여도 아무도 모른다면 필요 없는 종이일 뿐이다. 책을 출판하면 출판기념회도 하고, 사인회도 열고, 기사로 홍보도 하는데 왜 논문이나 연구보고서를 낼 때는 그렇게 하지 않을까? 연구성과를 다양한 방식으로 알리고, 연구물을 홍보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될 수 있도록 학계 구성원의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연구물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홍보에 정답은 없지만, 이번 원고를 작성하면서 국책연구기관 소속 구성원들이 바로 해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상상해봤다. 최소한 제목, 서론, 결론만이라도 대중 글쓰기를 해보면 어떨까? 중고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거다. 최근 만난 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위원은 보고서가 표지부터 재미없다는 생각에 최대한 재밌는 제목을 달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이 외에도 자발적으로 기관 유튜브 채널 개설에도 힘쓰고, 출연자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노력이 연구를 통해 국민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90초 논문 해설 영상

애초에 국민 질문을 받아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부 부처나 연구기관의 의지로 시작되는 연구 진행이 아니라 국민이 던지는 궁금증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보는 거다. 기본과제로 하긴 어렵겠지만 각 기관이 발간하는 이슈 페이퍼를 통해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영상도 지금과는 다른 참신한 방식을 고민해보면 좋겠다. 연구 기관들도 ‘김지윤의 지식플레이’, ‘조승연의 탐구생활’처럼 대중 친화적 지식 콘텐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학계를 주제로도 ‘네고왕’, ‘전과자’ 등과 같은 예능 채널도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팀은 현재 90초 안에 연구자 본인이 쓴 연구를 해설하는 영상을 만들고 있다. 모든 출연자가 하나같이 ‘길게 하지 않아도 이게 설명이 되네요’라며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시청자도 ‘핵심만 알 수 있어 좋다’라고 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연구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연구기관에서 연구자와 성과확산팀 직원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자가 쓴 논문은 본인, 지도교수, 심사위원까지 딱 3명만 읽는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것이 더는 우스운 말로 여겨져선 안 된다. ‘학자가 쓴 연구는 세상을 바꿀 힘을 갖는다’라는 말이 더 확산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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