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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보 앞서 현장 누비는 정책연구자들
국토의 균형발전과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연구자들. 실질적인 정책 대안의 답은 현장에 있다고 믿는 국토연구원의 류승한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장과 전봉경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 부연구위원이 만나 현장성과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연구자의 길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류승한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장(이하 류승한)
저는 경제지리학을 공부했고 주로 산업입지와 관련된 분야를 연구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왜 기업들이 한 군데 모이는가 하는, 산업 집적에 관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 온 거죠. 학부 시절에는 사범대학 지리교육학을 전공했는데 4학년 때 지도교수님이 주신 『제조업의 입지』라는 책을 읽고 매료되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된 분야에서 계속 연구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국토연구원으로 흘러오게 됐죠.
전봉경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 부연구위원(이하 전봉경)
이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역할이죠. 연구원에 오기 전에는 기업에서 근무했었는데 저 자신에 대한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큰 그림을 그려나가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어요.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고 보다 많은 사람이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하고 싶어 국토연구원에 오게 됐습니다.
정답 도출이 아닌 문제점을 파악하고 알리는 역할
류승한
국토연구원에서는 다양한 이해당사자 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과제들을 많이 다루는 편이죠. 예를 들면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평택 시민이 이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러니까 주한미군 이전에 따른 평택 지원 대책과 관련된 연구과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어요. 또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설 때 지역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좀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방안을 연구하거나 새만금 개발을 둘러싸고 개발론자와 환경론자 간의 갈등 속에서 합의점을 찾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어요. 이런 연구과제들은 경제학처럼 수리적인 모형을 통해 정답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자들 간의 협의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봉경
1년 전쯤 영국의 브렉시트와 관련하여 지역균형 발전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인식의 전환을 위해 짧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브렉시트를 이민자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영국 내 심각한 지역 격차가 사회 분열을 야기해 빚어진 결과라는 점을 들어 우리의 지역발전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비수도권의 신산업 육성방안’을 주제로 한 연구를 통해 6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경험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연구였습니다. 이런 연구방식은 류승한 본부장님의 말씀처럼 어떤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현장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봐요. 그동안 비수도권의 산업 육성방안을 논할 때 산업 육성과 주거·교통·복지 등의 정책을 분절적으로 다뤘던 측면이 있는데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지향점과 실제 현실을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정책연구자의 역할입니다.”
류승한 국토연구원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장
정책연구자, 현실과 정책 지향점 잇는 연결자
류승한
정책연구는 결국 현실을 개선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지향점과 실제 현실을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정책연구자의 역할이고요. 특히 국민 개개인 혹은 지역별로 마주하고 있는 다양한 현실 안에서 공통분모를 끄집어내고 집결시키는 것은 국토연구원 연구자로서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어느 시민단체 활동가 한 분이 썼던 글에서 “전문가는 반보만 앞서가야 한다”는 말이 있었어요. 한 걸음 이상 앞서가면 일반인은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는 동행한다는 느낌으로 반보만 앞서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제 생각에 국토연구원 연구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봅니다.
전봉경
학술연구는 일반적으로 과거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라고 본다면 정책연구는 현 시대를 넘어 미래 세대까지 고려한 대안을 내놓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교통 정책이든 주거 정책이든 앞으로 10년, 20년 뒤의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정책 대안을 만드는 것이 정책연구자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그것이 10년, 20년 뒤의 문제라 하면 류승한 본부장님 말씀처럼 반보 앞서가는 정도가 된다고 봐요. 지금 당장 도로를 깔거나 GTX 노선을 구축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완공되고 구동이 되기까지 5년에서 10년은 걸리니까 그 정도면 아주 먼 미래는 아니죠.
류승한
이해관계가 첨예한 이슈를 다룰 때 어려운 점이 많지만 정책연구는 내가 한 일의 결과를 비교적 짧은 기간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학술연구는 연구결과가 현실에 반영되더라도 굉장히 먼 미래의 일인 경우가 많죠. 노벨상을 받는 분들을 보면 수십 년 전에 했던 연구의 성과를 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한편으로 그런 특징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우리가 한 연구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는 상황도 목도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이유로 최선의 대안이 보이는 연구를 선호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결과가 암담해 보이는 사안은 기피하려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현실 속에서 최악을 피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훌륭한 대안이라고 봅니다. 어려운 과제와 마주한 연구자들에게 현재 당면한 현실이 정책연구자로서 충분히 가치 있는 지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봉경
다양한 세대와 시대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민 개개인이 느끼는 불편함이나 개선사항을 정부나 국회의원에게 직접 전달하기란 어렵잖아요. 그러한 목소리를 저희 같은 연구자들이 잘 구성해 정책 입안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지역주민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개인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60명의 인터뷰를 종합적으로 보면 단순히 개인의 민원이 아니라 사회와 정책의 문제로 환원이 되더라고요. 공무원들이 이런 일을 하기에는 여력이 안 되기 때문에 저희가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 그만큼 시민의 목소리를 잘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론적 개념과 현장성 놓치지 않아야
류승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점은 수많은 고민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나갔던 국가들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참고하면서 여러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죠. 정책연구를 잘하려면 이론적인 부분과 사례를 많이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어느 연구기관이든 인프라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이론적인 개념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현장과 현실에 대한 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정책을 연구하려면 현장을 알아야 하죠.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연구기관의 연구자라면 책상에 앉아 고민만 할 게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정책연구에 현장감이 사라진다면 암담해지는 거죠.
전봉경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결국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저는 여행을 굉장히 좋아해서 70개국을 다녔을 정도인데요. 책으로 보는 것과 실제 여러 국가와 도시를 가보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잖아요. 그런 점에서 최대한 시간을 내어 여행을 가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류승한 본부장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이론을 중요시하기에 책을 많이 읽는데 특히 전공과 관련 없는 인문학 책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요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를 읽고 있는데 원시사회의 부족 연구를 통해 저출생, 고령화 등 현재 사회문제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는 책이에요. 이처럼 인문학이나 심리학, 철학 분야의 책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간접경험을 하고자 한다면 전공 서적뿐 아니라 비전공 서적을 많이 읽어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누군가를 이해해야 하는 연구자 입장에서 편견을 갖는 것은 위험합니다. 원시 부족 사회는 미개하다는 식의 생각을 해선 안 되죠.
연구의 질적 향상, 보다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류승한
과거를 돌이켜보면 국토연구원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당시 팀장님이 산업단지 쪽 연구를 하려면 국내 산업단지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알아야 한다며 2주짜리 출장을 허락해준 적이 있어요. 당시의 경험이 현장의 감을 익히는 데 매우 도움이 됐죠. 지금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워요. 그러한 기회를 악용하는 사례가 생겨나다 보니 제도가 계속 바뀌어 왔는데 어떤 면에서는 연구자의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연구자들이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향으로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국책연구의 수행체계와 관련해서도 좀 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가령 딱 떨어지는 숫자로만 말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인터뷰 등을 통해 접근해야 하는 연구과제들이 있습니다. 단기적이고 일률적인 관점으로 과제를 평가하게 되면 질적 연구, 좋은 정책 대안이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전봉경
정책연구가 민원 해소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 제도화에 기여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책연구자들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고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사회현상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저희 연구자들의 역할이자 책임이 아닐까 싶어요. 또한 협동연구, 학제 간 연구가 강조되는 추세인데 연구기관들이 몰려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합니다. 연구과제에 대한 수행체계와 평가시스템이 보다 개선된 이후에 연구기관 간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되고 시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기관들이 공식적인 연구 교류에 나서기 이전에 비공식적인 관계들이 만들어지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실질적인 연구 교류가 이뤄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사회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설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연구자의 책임이 아닐까요.”
전봉경 국토연구원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 부연구위원
류승한
맞습니다.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친하게 지내라고 한다고 친해지는 건 아닙니다. 서로 취미가 같든지 어떤 계기가 있어야 친해지는 것이죠. 연구기관 간의 결합이 이뤄지려면 그 이전에 신뢰가 형성돼야 하고 연구자 간의 네트워크가 구축되도록 하는 방향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연구자에게 중요한 덕목은 전화를 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는 것보다 그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다른 연구자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금세 해결되거든요. 무엇보다 새로운 이슈와 과제 앞에서 도전정신을 갖고 덤빌 수 있는 자세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전봉경
저도 연구자에게 필요한 덕목이 뭘까 고민해봤는데요. 편견을 배제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세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좋은 연구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연구 과정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연구자로서, 우리 사회에 따뜻한 정책을 많이 제안하는 정책연구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류승한, 전봉경국토연구원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장, 국토연구원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 부연구위원
202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