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경계를 넘어  

21세기 국제관계의 아이러니, 우크라이나 전쟁

한정숙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2022 겨울호

2022년 2월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러 면에서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평화를 위해 냉전의 종식을 주도하고 탈냉전의 시대를 열었지만, 국제관계 재편성 구도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탈냉전은 오히려 또 하나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스트 세력 격파의 최대 공헌자였던 소련은 냉전 종식의 와중에서 해체되었거니와 그 계승국인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의 독일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해체되었지만, 나토(NATO)는 계속 확대되어 러시아인들의 관점에서 안보 불안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인들이 르상티망(원한)의 정동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갔던 것을 연상시킨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땅에서 사실상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푸틴은 핵무기 불사론까지 꺼내 들었다. 얄타 체제에 바탕을 둔 전후(戰後) 질서는 기묘하게 전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전범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승전국이었던 러시아를 격하게 비난하면서 군비증강에 거침없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소련의 해체와 이어지는 파장

소련이라는 정치체는 평화롭게 해체되었지만, 그 후 구소련 공간에서 크고 작은 유혈갈등이 발생하였는데, 규모가 가장 크고 국제적으로 가장 큰 파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소련은 1991년 말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주도 아래 맺어진 벨로베자 합의(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서명)에 따라 무너졌는데 옐친이 직접 선택한 후계자 푸틴은 “(당사국들의) 영토적 통합성을 보장한다”고 명시한 벨로베자 합의의 정신을 어기고 우크라이나 영토를 군사적으로 공격하였다.

러시아인들의 지배적 역사 인식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국가사의 출발점이고 문명의 근원인 형제국이므로 마땅히 러시아와 하나의 정치적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여겨져 왔다. 소련은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러시아 땅 일부를 할양해주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폴란드 지배 아래 있던 서부 우크라이나 땅까지 덧붙여줌으로써 역사적 우크라이나 영토를 모두 통합시켜주었다. 그런데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이 강경 민족주의자들의 본거지로서 반러시아 정서를 주도하게 되었고 러시아도 이에 대한 응징을 군사작전의 한 명분으로 삼게 되었다.

폴란드의 지배를 오래 받으며 종교적, 사회경제적으로 억압당했던 우크라이나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범한 폴란드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과거사 때문에 폴란드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폴란드는 과거사 문제 제기를 상당히 자제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인들은 폴란드를 가장 우호적인 이웃으로 여기고 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 합병은 상대적으로 손쉽게 이루어졌고 러시아 경제는 국제사회의 제재도 견뎌내며 유지되었다. 푸틴은 이 선례에 고무되어 우크라이나 본토 공격을 감행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군을 환영하리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객관적 전력에서 훨씬 우세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고전하고 있고, 전쟁 장기화에 따라 우크라이나인들의 고난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들의 마음을 얻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2022년 12월, 바이든과 공동 기자회견 중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속 미국의 자국중심주의

푸틴이 우크라이나 공격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가입 시도였다. 우크라이나가 나토가입을 헌법 사항으로 못박아가면서까지 추진하게 된 배후에는 미국의 강력한 견인작업이 있었다. 냉전 종식 이후 네오콘인 폴 월포비츠가 주창하여 조지 W 부시가 받아들인 “미국이 유일한 슈퍼 파워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구상은 러시아를 최종적으로 약화시키겠다는 목표와 연결되었다. 러시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키신저, 미어샤이머 같은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결과 서방이 이득을 얻게 될지는 미지수다. 미국은 군사·정치적으로는 동맹 강화를 꾀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보호무역에 가까운 자국중심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유럽 경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난 속에서 산업 기반이 흔들리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기에 미국의 경제적 자국중심주의가 계속된다면 서방의 단합이 얼마나 계속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러시아는 서방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한 노력을 더이상 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이 전쟁은 러-중의 밀착을 강화하였고, 인도, 튀르키예,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가 러시아에 비적대적이고 때로는 우호적이기까지 함을 보여주었다.

이념 구분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틀로 보아야

국제사회의 대결과 합종연횡의 구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 틀이 필요하다. 냉전 시대 이래의 이념 구분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현재 러시아 편을 드는 세력 중에는 진보 좌파도 있지만 극우의 비중도 꽤 크다. 20세기 소련과는 달리 21세기의 러시아는 다른 사회를 향해 이념을 설파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런 한편 헌팅턴의 문명충돌론도 무색해졌다. 종교적, 언어적으로 가장 가까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정세에 미치는 영향은 부정적이다. 러시아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일원이었고 북한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지 않음을 생각할 때 특히 그렇다. 한국인들 다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비판하지만, 한·러 관계 악화와 북·중·러 관계 밀착으로 북한의 공격적 태도가 강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통해 북·중·러 대륙 세력의 군사적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태도는 좋게 표현해서 “순진하다.”

인류는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었을 탈냉전 30년 세월을 잃어버렸다. 공멸로 나아가기 전에 지역적, 전 지구적 차원의 평화를 수립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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