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칼럼
아동 인권과 글로벌 인도주의 위기
국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인권’ 개념이 등장한 것은 불과 3백 년도 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현대적 개념의 인권이 학문과 사상의 영역을 넘어 실제 국가의 이념으로 반영된 것은 18세기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이 처음이었다. 그 후 민주주의 확산과 함께 인권도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20세기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인권 침해를 경험한 국제사회는 1945년 창설된 유엔의 3대 핵심과제로 인권을 포함시키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선언 제1조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라는 규정은 인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 되었다.
아동 인권을 향한 국제사회의 발걸음
아동이나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은 이미 유엔 창설 전부터 시작되었다. 아동의 인권과 관련해서는 1919년 영국 여성 에글렌타인 젭(Eglantyne Jebb)이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을 창설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군사적 봉쇄로 아동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모든 아동은 국적, 인종, 종교와 무관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취지로 아동권리 옹호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국제연맹은 1924년 젭 여사가 제안한 ‘제네바 아동권리선언’을 채택하였다. 이후 유엔은 제네바 선언을 발전시켜 1989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채택하였다. 현존하는 9개의 유엔 인권 협약 중에 가장 많은 국가가 가입한 이 협약은 아동을 보호 대상뿐 아니라 적극적인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글로벌 인도주의 위기와 국제사회의 과제
‘인도주의’는 인권과 유사성이 있는 개념이지만 국제적으로는 다소 맥락을 달리한다. 유엔을 포함한 국제기구에서 인도주의라는 용어는 거의 항상 ‘인도적 위기’의 맥락에서 사용한다. 즉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안녕이 중요하긴 하지만 특히 안전과 존엄성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도주의가 적용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인도적 위기는 점점 더 증가하고 심각해지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지구촌으로 좁아진 세계에서 글로벌 문제들은 급증하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세계정부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즉 국제사회는 세계화라는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민족국가 중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엔이 세계정부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로 보인다.
기후변화가 심각한 수준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해도 국가들은 지구 전체보다는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하여 대처하고 있다. 수많은 자연재해로 인도적 위기가 발생하고 있지만 인도적 지원이라는 사후약방문 격의 대응에만 급급하다. 안보 분야에서도 유엔을 중심으로 한 평화유지 체제가 있어도 주권국가, 특히 강대국들을 복속시킬 방법이 없으므로 각종 무력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협력 대신 대립을 선택할 때 인도적 위기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의 예만 보아도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등에서의 전쟁과 함께 홍수, 산불, 지진 등 각종 자연재해가 증가하고 있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전 세계에 3억 6천만 명이 인도적 위기에 처하고 있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고 작년에 밝혔다.
우리의 미래는 아동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을 제대로 보호하고 지켜내지 못한다면 인류의 진보와 지속 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위기 속의 아동 보호 필요성
모든 종류의 인도적 위기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 특히 아동과 여성은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난민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임을 통계가 입증해 주는데 남성은 직접 전투를 수행하거나 돈벌이를 위해 집을 떠나 있는 경우가 흔함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가 된다. 수많은 아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자신과 아무 관계 없이 일어난 분쟁으로 폭력의 최대 피해자가 되고 있다. 전쟁 발발 1년이 되어 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는 16,000명이 넘는 아동이 사망하여 전체 사망자 숫자의 40%를 넘어섰다. “모든 전쟁은 아동에 대한 전쟁”이라고 한 1백 년 전 젭 여사의 말에 절감하게 된다.
전쟁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는 것도 아동의 희생과 고통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된다. 국가 간 전쟁이 아닌 내전이 증가하고 무장 세력이 늘어나면서 삶의 터전과 전투 현장 간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민간인을 최전선에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비인도적 행위가 늘어나고 병원과 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의도적 공격까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이 아동에 끼치는 해악은 아동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굶주림과 질병에 고통받을 뿐 아니라 학업 중단으로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폭력과 재해로부터 아동을 보호하지 못하는 세상은 그 누구에게도 안전한 세상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 지역의 문제를 넘어 전체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글로벌 위기이다. 세계 여러 곳의 아동이 ‘잃어버린 세대’가 되지 않고 위기 속에서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단합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의 미래는 아동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을 제대로 보호하고 지켜내지 못한다면 인류의 진보와 지속 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특히 작년 합계출산율 0.72를 기록하여 세계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더욱 심각한 과제다. 국내적으로 아이를 키우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 국제적으로는 인도적 위기 속의 아동들을 구해야 한다는 이중의 시대적 책임을 갖기 때문이다. 나라 안에서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필요하고 나라 밖에서는 그들의 울음소리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오준한국아동단체협의회 회장(前유엔 대사)
2024 가을호